KIKO 사태: 15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중소기업의 눈물과 투쟁, 대한민국의 현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전 세계를 강타했지만, 대한민국의 수많은 중소기업에게는 KIKO(키코)라는 이름의 더욱 가혹한 악몽으로 다가왔습니다. 환율 변동의 위험을 막아주겠다던 '안전장치'는 순식간에 기업의 목숨을 조여오는 흉기가 되었고, 건실했던 수출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도산하는 비극이 이어졌습니다.

그로부터 15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법원과 거리에서 싸움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의 이야기를 통해 KIKO 사태의 본질과 남겨진 과제들을 되짚어봅니다.

KIKO(Knock-In, Knock-Out): 환헤지 상품인가, 파산의 덫인가?




KIKO는 'Knock-In, Knock-Out'의 약자로, 환율이 일정 범위 안에서 변동할 경우 기업이 약정 환율로 달러를 팔아 환차익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된 파생상품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수출 중소기업들이 환율 하락으로 인한 손실을 방지하기 위한 환헤지(Hedge) 상품으로 홍보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상품에는 치명적인 독소 조항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환율이 사전에 정해진 상한선(Knock-In)을 넘어서 급등하게 되면, 기업은 시장 환율보다 턱없이 낮은 약정 환율로 계약 금액의 두 배 이상을 은행에 매도해야 하는 구조였기 때문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로 원-달러 환율이 폭등하자, 이 독소 조항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환율 상승으로 이득을 봐야 할 수출 기업들이 오히려 막대한 손실을 떠안게 된 것입니다.

당시 KIKO 공동대책위원회에 따르면 피해 기업은 723곳, 피해액은 약 3조 3천억 원에 달했습니다. 제품을 잘 만들고 수출을 잘하던 건실한 기업들이 오직 이 금융 상품 하나 때문에 흑자 도산하는 사태가 줄을 이었습니다.

불완전 판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계약



KIKO 사태의 핵심은 은행들의 불완전 판매에 있습니다. 당시 은행들은 기업들에게 상품의 구조와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환율이 상승할 경우 손실이 무한대로 확대될 수 있는 레버리지 구조(Over-Hedge)에 대한 경고는 미흡했습니다. 금융 전문가인 은행과 비전문가인 중소기업 사이의 정보 비대칭이 극심한 상황에서, 은행은 고객 보호 의무인 적합성 원칙설명 의무를 위반했습니다.

금융감독원조차 사후 조사를 통해 은행들의 이러한 불완전 판매 행위를 인정했습니다. 은행들은 KIKO를 단순한 보험 성격의 상품으로 포장해 판매했고, 중소기업들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위험에 노출된 채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되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금융 시장에서 중소기업이 철저한 '약자'의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15년의 외침, 그리고 멈추지 않은 소송전



사태 발생 이후 15년이 지났지만, 피해 기업들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2013년 대법원은 KIKO 계약 자체를 사기로 보지는 않았으나, 은행들의 설명 의무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은 일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피해 기업들이 입은 내상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위로였습니다.

희망의 불씨가 다시 타오른 것은 2019년이었습니다.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는 키코 사태를 재조명하며 은행들에게 피해 기업 손실액의 15%~41%를 배상하라고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우리은행만이 이 조정안을 수용했을 뿐, 신한은행, KDB산업은행, KEB하나은행, 대구은행, 씨티은행 등 대다수의 은행은 배임 우려와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배상을 거부했습니다.

국민은행을 포함한 당시 시중 은행들이 판매했던 이 상품은 결국 은행권 전체의 신뢰 문제로 번졌으나, 은행들은 법적 방어막 뒤에 숨는 것을 택했습니다. 이로 인해 피해 기업들은 2023년과 2025년 현재까지도 금감원의 조정 결정을 거부한 은행들을 상대로 힘겨운 민사 소송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성하이스코와 같은 기업들이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이유는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금융 정의를 바로 세우고, 다시는 이러한 금융 폭력이 중소기업을 덮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맺음말: 약자를 위한 금융은 어디에 있는가



KIKO 사태는 금융 기관의 탐욕과 도덕적 해이가 실물 경제의 허리인 중소기업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 보여준 비극적인 역사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중소기업은 그저 약자에 불과했다"는 피해자들의 한탄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KIKO 소송은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공정한 금융 관행에 대한 경종이자, 피해자들의 회복되지 않은 권리에 대한 질문입니다.

사법부와 금융 당국, 그리고 은행권이 이제라도 피해 기업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진정한 의미의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15년의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이 사태를 끝까지 지켜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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